(9월8일 주일설교/열왕기하 1:1-4/인생의 문제를 만난 성도에게!)
1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반역하였다.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방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래서 그는 사절단을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보내어,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를 물어 보게 하였다. 3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디셉 사람 엘리야를 보고, 사마리아 왕의 사절단을 만나서 이렇게 전하라고 명령하였다.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다니,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4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올라가 누운 그 병상에서 일어나 내려오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 엘리야는 천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
신앙인이란 문제를 안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말씀으로 해석하고 믿음으로 풀어내는 능력을 “갖춰가는” 사람입니다. 열왕기하는 이스라엘의 속국이었던 모압이 반역하고, 왕 아하시야가 큰 사고를 당하는 등 이스라엘이 총체적으로 병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고난 중에 아하시야가 보인 반응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하들을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보내어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를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 아합 시대 때부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그는 이같은 어리석고도 교만한 행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재밌게 흘러갑니다. 아하시야가 자신의 사자들을 에그론의 바알세붑 신전으로 보내자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들을 엘리야에게 보내십니다. 얼마나 명확한 대조입니까? 누가 세상의 주인인지를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분은 우리가 신뢰하고 경배하는 여호와 하나님 뿐이신 줄로 믿습니다.
인간의 생과 사가 하나님 손에 달렸는데, 하나님이 그 택하신 자녀들의 인생을 어찌 돌보시고 책임져주시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인생의 문제를 만났을 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주권 속에 있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바알세붑을 찾은 이유가 뭐였겠습니까? 그 우상이 자기한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상은 돌조각 나무조각이 아니라 위급할 때, 인생의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우상입니다. 내가 가장 의지하니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아하시야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호통을 하나님께로부터 들어본 적은 없습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인데, 왜 이리 호들갑이냐고, 왜 이리 인간적인 방법을 쓰냐?”고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붙드셔야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만 붙들어야지, 하나님 아닌 것을 붙잡으면 그 붙잡은 것이랑 함께 추락하고 맙니다. 그러면 하나님 붙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4절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새번역으로 보면 “엘리야는 천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있어야 할 신뢰와 순종의 관계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신뢰하지 않았으니 순종하지 않은 것, 그게 아하시야의 죄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문제를 만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붙든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성도라고 해서 문제가 비켜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옹졸한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가 죄 지었다고 벌 주시고 뒤에서 웃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인생의 문제를 만났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돌아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바라기는 인생의 문제를 만났을 때 (1)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2)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 (3)내가 바뀌고 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피면서 고난을 유익으로 만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깊이 느낀 적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아하시야가 보낸 오십부장은 궁중에서는 왕의 말을 들었고, 갈멜산에서는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동시에 들린 경험이 있다면 생각해보고, 그때의 성공담과 실패담을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