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16일 주간 목장모임 나눔지
목장모임 말씀 나눔지
(3월16일 주일설교/누가복음 10:30-37/예수님의 파격破格)
3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35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
하루는 어떤 율법전문가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공식적인 자격도 없으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예수가 못마땅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시험해보려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시고 오히려 그의 생각을 물으셨고,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네 대답이 옳도다”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지만 이어서 말씀하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씀이 영 마음에 걸렸는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바로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 나오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 불쌍한 사람을 봤으면서도 피해서 지나갑니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강도 만난 자의 옷이 벗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옷이 벗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출신, 신분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그 길을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자를 보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가 같은 동족 사마리아 사람인지 아니면 유대인인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누가 내 이웃인지 미리 정해 놓은 선이 없었습니다. 이 비유 후에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의 질문 속에 담긴 파격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은 내 길을 걷는 성도라면 ‘누구는 사랑할 사람, 누구는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제자의 길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란다. 제발 선을 넘어라! 세상이 정해 놓은 선에 갇히지 말아라!”
이 유명한 비유 뒤에 누가는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를 우리가 연이어서 읽도록 배치해 놓았습니다. 사실 시간 순서로 보면 이 얘기는 한참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앞의 이야기에다 붙여서 기록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같은 주제를 반복하면서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동네에 들어오신 예수님 일행을 초대한 마르다는 음식 준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거실은 남성의 공간이고 부엌은 여성의 공간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공간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행22:3절 참조).
마르다가 기분이 상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물론 자기를 돕지 않는 동생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지만, 마르다는 경계를 넘는 동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언행이 언제나 파워를 가져온 것은 그분의 언행은 늘 경계를 허무는 파격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과 의인을 섞는 파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십자가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섞는 파격의 삶을 살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파격이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 준 것처럼, 경계를 허무는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능력이 넘쳐날 것입니다.
내 삶에서 허물고 넘어야 할 것인 줄 알면서도 갇혀 있는 경계는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복음서의 이야기는 MIX-story입니다. 섞일 때 능력이 나옵니다. 내가 섞여야 할 사람들, 섞여야 할 일들에는 무엇이 있을지 결단한 것이 있으면 나눠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