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3월 02일 주간 목장모임 나눔지
목장모임 말씀 나눔지
(3월2일 주일설교/누가복음 8:43-48/욕망을 희망으로 바꿔주신 예수님)
43 무리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는데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고쳐주지 못하였다. 44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 곧 출혈이 그쳤다. 45 예수께서 물으셨다.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이 모두 부인하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46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 47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그에게 손을 댄 이유와 또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백성 앞에 알렸다. 48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희망을 슬쩍 보여주었다가 그걸 움켜쥐려는 찰나 다시 빼앗아 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고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희망고문조차도 사치스러운 절망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희망, 성도가 가져야 할 희망은 무엇일까요? 어느날 예수님을 따르는 인파 속으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그 여인은 오랜 세월 동안 몸은 몸대로 괴롭고, 병 고쳐보려고 있는 돈은 다 쓰느라 가난해졌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힘들었던 것은 이 병은 나병처럼 부정한 병으로 여겨져서 정상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절망 가운데 살던 여인에게 예수님이 자기가 사는 동네를 지나가시는 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부정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는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녀에게 이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힘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플로랜스 채드윅이라는 수영 선수가 카탈리나 해협을 건너는 일을 처음으로 도전했을 때, 그녀는 안타깝게도 해안선을 불과 1마일 남기고 포기를 했습니다. 이유는 갑자기 밀려온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더이상 해변을 볼 수가 없었을 때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그녀는 다시 같은 코스에 도전했습니다. 이번에도 짙은 안개가 끼였지만 그녀는 결국 도전에 성공했습니다. 해변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머릿속으로 해변을 그렸습니다. 안개 저 뒤편에 있는 육지를 계속 상상하며 헤엄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힘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이 희망의 힘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옷을 만진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기 옷을 만진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아니 그녀의 딱한 처지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 여인의 병이 나았다는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조용히 가게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굳이 이 여인을 군중 앞에 세우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여인은 병 낫기를 원했습니다. ‘사건’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원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을 만짐으로 병고침 받고 그냥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면 그 여인은 병은 고침받았겠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없어지고 내게 마술적인 능력을 일으켜 주었던 그 ‘옷’만 남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에게까지 올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을 희망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욕망이라고 해야 더 맞습니다. 욕망은 내가 간절히 바라는 대상에 대한 것이고, 희망은 누군가를 향한 신뢰입니다. 욕망은 what이고 희망은 who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삶이 욕망하던 것을 성취하는 데 머물지 않고, 희망을 주는 분과의 아름다운 만남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신앙생활을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것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오직 나를 믿어주시고 붙잡아주시는 예수님 한분만을 신뢰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내 소원을 위해서 기도하다가(사건/욕망) 그 기도시간 자체가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은 시간이 된(예수님과의 만남/희망) 경험들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또한 유홍준 시인의 시처럼 목장생활이 나에게 “사람을 쬐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함께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