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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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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목자컨퍼런스를 잘 마치고 왔습니다. 평신도세미나에 가면 참석자들을 ‘천사’라고 호칭하며 섬겨줍니다. 목자컨퍼런스는 삼사백 명이 참석하는 행사라 그런 섬김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수고하시는 목자목녀님들을 섬겨드리고자 그 전날부터 가서 일을 했습니다. 땡볕에서 2시간 동안 주차안내도 하고, 아침과 밤에는 숙소로 식사와 간식을 배달하기도 하고, 못하는 노래지만 특송도 하고...작은 섬김이지만 목자목녀님들은 참 고마워하셨습니다. 전통교회에서 가정교회로 전환한 지가 얼마 되지 않는 교회의 목자목녀님들은 저희들의 그런 작은 섬김에 몸 둘 바를 몰라 하셨습니다. 사실 목자목녀들은 섬기는 것이 익숙해지신 분들입니다. 내 시간을 쓰고, 내 돈을 쓰고, 내 힘을 쓰는 일이 몸에 배신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목녀들이 목원들을 위해서 꼭 그래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학을 공부한 전문사역자들도 아니고, 교회에서 사례를 받는 분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남자집사님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회사에서 MZ세대들과 대화를 하거나 일을 하기가 참 힘들다고 토로하십니다. 그들의 말 속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이 세 가지라고 합니다. “이걸요?” “제가요?” “왜요?” 자기가 납득이 되지 않으면 절대 하지 않는, 자기에게 손해가 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분위기와 정신이 이 시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특별히 가정교회에는 이 시대에 역행하는 섬김의 문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좀 아픈 것은, 이런 섬김을 계속 받다보면 이 섬김에 별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목자목녀는 으레껏 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목장식구들이 목자목녀의 섬김과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목장은 가족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고, 아내가 남편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가정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목자목녀와 목장식구는 동역의 관계입니다. 목자목녀는 항상 섬겨야 하고 목장식구는 섬김을 받기만 하는 것은 정상적인 가정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번처럼 목자목녀가 컨퍼런스를 참석해야 할 때, “목자가 없으니 이번 주 목장모임은 쉬어서 좋다” 혹은 “목자님이 오시면 주일날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없으니 우리 가정이 한번 섬겨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목장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한 사람! 그 한 사람, 그 한 가정이 있을 때 여러분의 목장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건강해질 것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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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왜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을까요? 그 금신상이 하나님보다 소중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이걸 반대로 해서 우리 삶에 적용해보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가치를 두는 것이 있다면 그게 우리 금신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가치를 두는 그것들이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그런 것들은 성공, 사랑, 돈, 사회적 지위, 성취, 건강, 가정, 이런 것들일텐데 그런 것들은 다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것이 궁극적인 것으로 바뀌는 순간, 즉 “난 그거 없으면 못 살아!”가 되는 순간 그것이 내 금신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생각해봅시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이 내게 저 사람보다 하나라도 더 많이 주신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돈을 많이 주셨다면 그것은 남을 도우라고 주신 사명이니까 써야 합니다. 그때 나에게는 돈이 금신상이 되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성도 중에 한 분이 부목사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언제 새벽이나 수요일날 설교하실 기회가 되면 이것 한번 성도들에게 말해주세요” “뭔데요?” “예배 시간에 핸드폰으로 비트코인이나 주식 좀 보지 말라고 해 주세요.” 회사원들이 직장 가서 일하면서 틈틈이 주식 들여다본다는 말은 들었지만, 성도들이 예배시간까지 그러는 분들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 그 성도님이 그런 모습들을 자주 보셨나봐요. 그런 분들에게는 이미 돈이 좋은 것이 아닌, 금신상이 된 거예요. 액수가 문제가 아니예요. 우리는 돈을 부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돈에 절하는 사람된 거예요. 그러니까 돈이 내 마음의 금신상이 된 거지요. 돈은 대표적인 우상이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돈을 맘몬(돈신)이라고 하셨던 거지요. 

 

 여러분, 돈은 많든 적든 우리의 금신상이 되기에 충분한 위력을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돈은 우리를 두 가지 방향에서 지배하기 때문인데, 돈이 많으면 돈은 욕심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고, 돈이 없으면 돈은 염려와 불안을 통해 우리를 지배해요. 즉 어떻게든 더 벌고 싶은 욕심에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거기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도 탐심이고, ‘나 이렇게 돈이 없어서 어떡하나, 더 아껴야 해’ 그러면서 남을 위해서 돈 쓰는 것에 과도하게 인색한 것도 탐심이예요.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돈에 대한 가치관은 청년 때에 정립해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훈련을 목장에서부터 하기를 원합니다. 알바를 해서 번 소중한 돈을 가지고 목장모임 간식으로 과자를 사 가지고 가는 지체를 보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청년은 돈이라는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훈련을 이 순간도 하고 있구나” 제가 말하는 순교적 영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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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캠핑을 좋아하시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아이들 정서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몇 달 전에 서울에 사는 친구 가정과 캠핑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언젠가부터 캠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그날 보니 완전히 캠핑 고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와 아내야 캠핑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정말 몸만 갔습니다. 그 친구가 캠핑 장소 예약부터(저를 위해서 공주까지 내려와 주었습니다), 캠핑 장비(캠핑은 장비빨^^이라는 말이 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까지 다 준비해주었습니다. 그렇게 1박2일 캠핑을 한번 해보고 나니까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거기에 빠지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물론 빠지는 이유야 다 다르겠지만, 내가 만약 캠핑에 빠진다면 나는, 캠핑이 주는 ‘사귐과 교제’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캠핑을 하니 시간이 참 더디게 갔습니다. 입과 눈이 바쁘지가 않았습니다. 먹는 것도 간단했고, 앞의 호수와 꽃들은 제 시선을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에서 빼앗아 갔습니다. 친구는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는데도 불을 피웠습니다. 캠핑의 맛은 불멍이라며....그렇게 불을 피워 놓고 그 불 주위에 우리 네 명은 둘러앉아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는데 끝이 없었습니다. 서로의 아이들 얘기를 하며, 서로의 교회 얘기를 하며. 캠핑장 주인이 와서 이제는 좀 취침해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밤을 새웠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텐트 안은 역시 불편했습니다.(이럴 줄 알고 저는 당일치기 캠핑을 처음에는 고집했었습니다.) 친구가 우리 부부를 위해서 쿠션 좋은 최신 매트리스를 준비해주었건만 역시 내 집, 내 침대가 최고였습니다. 그날 밤 저는 캠핑의 매력을 알았습니다. 캠핑은 불편함과 동시에 그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는 깊은 ‘사귐과 교제’가 있는 것, 그게 캠핑의 매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달도 더 지난 일을 칼럼으로 쓰는 이유는, 7월 내내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다보니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캠핑과 같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the tabernacle of God)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얼마나 불편하셨을까요? 우주를 만드신 분이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오셨으니, 시간을 만드신 분이 시간 안에 갇히러 오셨으니, 무한이 유한 안으로 들어오신 그 불편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 이유, 나와 함께 깊은 사귐과 교제를 갖으시려고 그 엄청난 불편을 감수하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 그분 덕분에 나는 영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불멸(不滅)과 필멸(必滅)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을 위해서 반드시 없어질 것은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날 나를 위해서 멋진 하룻밤 캠핑을 준비해 준 그 친구가 더 고마웠습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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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K푸드, K컨텐츠, 선교사님들과 만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화 소재는 K열풍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이 북미에서 5,337만 달러의 흥행기록을 세웠는데 이번에 그 기록을 뛰어넘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장성호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입니다. 장성호 감독은 “어떻게 예수의 생애라는 뻔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나는 이 위대한 예수님의 생애가 어떻게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그동안 한번도 만들어지지 않았을까가 더 의문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요기도회가 끝나고 종현 형제가 “목사님 <킹 오브 킹스>라는 영화 곧 개봉인데 같이 보러 가지 않으실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라고 했는데 기사를 찾아보니 꼭 봐야 할 것 같아서 지난 주 월요일 시간을 내서 가족들과 영화관엘 갔습니다.(같이 보러 가자 했던 종현이한테는 미안하네요ㅠ)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세익스피어와 함께 영국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찰스 디킨스가 오직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썼던 <예수의 생애>를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당연히 출판은 물론 이 원고는 세상에 공개하지 말라고 유언하기까지 했는데, 85년 동안은 가족의 소중한 비밀로 간직되어 오다가, 훗날 손자들의 바램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 속에서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기를 바랄 것이기에 기독 부모들이 보면 참 좋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느라 아이들을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일할 때는 문에 “들어오지 마세요”라는 종이를 붙입니다. 아들 월터는 아서왕 이야기에 꽂혀서 장난감 칼을 들고서 자기가 마치 원탁의 기사라도 된 듯한 착각 속에서 아빠의 일을 방해합니다. 아빠와 아들은 서로의 세계에 몰입되어 갈등합니다. 그때 아내의 역할이 빛을 발합니다. 아내는 아서왕 이야기에 꽂힌 아들에게 정말 왕 중의 왕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떻겠냐고 남편을 설득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다른 부분은 너무 익숙한 부분이었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감동이 되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아빠와 아이들 관계가 어렵습니다. 둘 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들은 일 때문에 늘 바빠서 지쳐있고, 아이들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아빠와 대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관계를 부드럽게 이어줄 사람은 바로 아내요 엄마입니다. 그래서 이런 역할을 하는 아내를 잠언에서는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이지만, 제 마음에는 지혜로운 아내요 엄마인 캐서린으로 인해서 아빠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 계속 기억에 남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손목사-


2025.07.19 16:04

휴가다운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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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칼한 일이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편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 우리에게는 자기 관점에서만 사물이나 사건을 보는 경향이 다분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살기에 바빠서 자기를 돌아볼 여유를 갖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쁜 일상을 며칠이라도 탈피하는 것이 휴가라서, 그런 시간동안 자신을 살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벌써 ‘이번 여름휴가는 어딜가지?’ 인터넷을 검색하며 평소보다 더 바쁘고 분주하고 복잡한 일정을 계획합니다. 그래서 월요일 증후군처럼 휴가 후유증을 앓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바쁜 일상을 살아가지만, 생이 끝날 때쯤에는 누구나 예외 없이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은 조금은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인생을 잘 살았나?> <하나님 앞에 가면 뭐라고 하실까?> 요즘은 매일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고 있어서인지 더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올 가을은 성도님들 자녀 결혼식이 여섯 가정이나 있습니다. 저는 결혼을 앞둔 신랑신부에게 과제를 내 줄 때 꼭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라이프 스토리를 적어보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몇 살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결혼 전후의 삶은 너무나 달라지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내 자신에게 묻고 대답하는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결혼과제를 내 줄 때뿐만 아니라 새가족반이나 삶공부 등에서도 제가 종종 성도님들께 묻는 질문은 이런 겁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입니까? 내 삶에서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고 그 일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와 최고전성기는 언제였습니까?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한 것, 혹은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금 당신이 추구하며 살아온 것,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살아온 지금 당신의 삶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이것만은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바꿔야 합니까? 이대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이번 여름휴가 때 가족들과 여행도 가셔야 하겠지만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이런 기회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진다면 정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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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자는 80.6세, 여자는 86.4세로,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5.9년 더 깁니다. 그에 반해 건강 수명은 남성 70.7세, 여성 74.1세입니다. 즉 남녀 모두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지내는 기간이 평균 10년 이상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주위를 보면 연세드신 부모님들을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모시는 성도님들이 제법 많으십니다. 유치원의 숫자는 줄어드는 대신에 어르신들을 위한 주간보호센터나 요양병원, 요양원은 동네마다 세워지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는 나중에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을 나이가 되면 스스로 요양원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우리도 요양원만은 가지 않으려고 버틸지도 모릅니다. 가족들로부터 버림받는 느낌이 들지도 모릅니다. 요양원에 부모님을 보내는 경우 중에 치매로 인해 기억력을 상실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시는데, 찾아뵐 때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해드려야 할까요? 아래에 옮기는 글은 중증 치매 환자를 돌보고 있는 요양원 간병인이 쓴 것인데 간단하게만 옮겨봅니다. 

 

 “치매 환자 중에는 화를 잘 내고 폭력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외롭고 힘들어서 그럽니다. 누가 같이 있어주고 사랑받는다고 느끼면 그러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당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저는 치매 환자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거나, 설득하려 하거나, 치료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무례한 말을 해도 바로 잡아주지 않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그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저는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제 이름을 말하고 당신을 돌봐드리러 왔다고 말합니다. 제 이름을 틀리게 불러도 바로 잡지 않고 내 이름인양 응대합니다. 방에 있지도 않은 사람과 대화를 나눠도 방에 그런 사람 없다고 말하지 않고 잠잠히 듣고만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해도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말합니다. 허황된 추억담을 늘어놓아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주고 똑같은 가족사진을 몇 번씩 보여주어도 처음 보는 것처럼 같이 봅니다. 할 말이 없으면 손을 마주 잡고 몇 시간씩 창밖을 내다보기도 합니다. 치매 환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 같이 있어 주고, 관심을 쏟아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못 알아봐도 섭섭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이 누구이든, 같이 있어 주고 관심을 쏟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이분들은 행복해 합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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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로운 삶 수료식을 함으로써 전반기 삶공부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번에는 생명의 삶 47명, 새로운 삶 29명, 확신의 삶 18명, 말씀의 삶 9명, 일터의 삶 10명, 생명언어의 삶 21명, 총 134명이 삶공부를 수강하셨습니다. 삶공부는 수료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출석이나 과제가 기준을 미치지 못했을 때는 탈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함께 수료를 못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안타깝지만 이런 경우는 제가 사정을 “봐 드려서” 수료를 하는 것보다 오히려 다음 기회에 한번 더 도전하는 것이 좋은 것이니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가정교회의 성경공부를 ‘삶공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지정의’(知情意)가 채워질 때 행복해집니다. 나이가 5-60세가 되어서도 대학에 들어가서 스무살 청년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분들을 보면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지적인 부분이 만족될 때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그렇습니다. 아마 유교적인 영향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높은 교육열이 신앙에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서 신앙의 성장도 성경교육으로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균형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의지나 실천이 중요하지만 교회가 그것만 강조하면 그저 선한 일 많이 하는구호단체가 됩니다. 신앙생활에 감정이 따라오면 좋지만, 그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면 소위 말하는 기도원파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지성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이지만 지성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면 교회 분위기가 차가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공부의 목적은 수료에 있지 않고 삶의 변화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삶공부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세 부류인데 첫 수강자, 재수강자, 반복수강자들입니다. 재수강자란 한번 탈락하셔서 다시 도전하시는 분들이고, 반복수강자들은 이미 수료를 하셨지만 다시 들으시는 분들을 말합니다. 삶공부를 반복해서 들으시는 분들은 삶공부의 목적을 아시는 분들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강의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 보통 그 내용의 20%를 흡수한다고 합니다. 들을 때는 다 이해한 것 같아도 실상 내가 온전히 흡수한 것은 그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공부도 반복해서 들을 때 전에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게 되고 그러면서 내 삶의 변화가 조금씩 이뤄지는 것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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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키우면서 ‘답답함’을 느껴보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요? 물론 “나는 애들한테 공부하라는 말 한번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다 자기들이 스스로 했어요! 대학도, 취업도, 결혼도 그냥 자기들이 다 알아서 했어요!” 이런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런 부모들을 보면 ‘하나님은 저 사람에게는 무슨 복을 저렇게도 많이 주셨을까?’하고 속으로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도님들의 가정을 심방해보면 그런 분들에게도 절절한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취업을 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안 다니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예 주님을 떠난 자녀들, 늦지 않게 결혼을 한 것까지는 감사한데, 자녀가 생기지 않든지,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하는 자녀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시는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결국 아무리 자녀가 남들보다 잘 나가는 것 같아도 모든 부모는 똑같습니다. 부모는 영원한 부모입니다.

 

지난 월요일에는 오기곤 선교사님을 만나서 브라질 목장식구들과 식사하며 교제를 했습니다. 오선교사님은 제 대학 동기입니다. 총신대학교에는 헤세드라는 찬양팀이 있습니다. 신학교이기 때문에 매일 채플이 있어서 헤세드의 찬양인도자였던 오 선교사를 모르는 학생들은 없었습니다. 저와 나이도 같기 때문에 자녀들 나이도 거의 같은데, 오선교사님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습니다. 한 명은 브라질에서 아빠와 같이 선교사역을 하고, 한 명은 멕시코에서 직장을 다닌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교사님들의 헌신을 귀하게 보시고 그 자녀들에게는 참 복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탁월하게 자라는 아들들임에도 선교사님도 ‘답답함’을 느끼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너무나도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그 눈길로 내 자녀를 보자”라는 것이었답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생명의 삶에서 제가 가르치는 ‘성도의 신분’에 관한 내용이 생각이 났습니다. “성도님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殿)입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깨달은 것은 ‘여기서 내가 한 가지를 더 가르쳤어야 했구나, 아니 가르치기 전에 내 삶에 적용했어야 되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시듯이, 나도 내 자녀를 그렇게 바라봐야 되겠구나! ○○이는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시는 아이지! ○○이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시고 계시지!’ 이런 눈길로 우리가 내 자녀를 바라본다면 예전의 ‘답답함’은 자연스럽게 소망과 기대와 감사로 바뀌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친구 오선교사님께 한 수 배운 행복한 월요일이었습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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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전 월요일,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제 다이어리에 <6월9일 서울성도님들>이라고 적혀 있는 날이었습니다. 10시에 “이산가족들 지금 만나서 출발합니다”라는 톡이 왔습니다. 차 안에서 너무 신나게 얘기하시는 바람에 길을 놓쳐 1시나 되어서야 교회 주차장에 도착을 하셨습니다. 그리웠던 얼굴들이 차에서 내리셨고, 그들을 이산가족 되게 만든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셨습니다. 제가 행복한교회로 오기로 결정을 했을 때 저는 ‘내가 떠나도 우리 교회는 절대 흔들리지 않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익숙해진 성도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맞아들이는 데에는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를 떠났고 또 그 자리에 많은 새로운 분들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날 오신 분이 다섯 분인데 두 분 빼고는 섬기는 교회가 다 달랐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내가 그런 결정만 안했더라도 아무 일 없이 같은 교회 섬기면서 행복하게 지내셨을 분들인데~’하는 생각에 여전히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우리들의 대화는 영적으로는 무척이나 풍성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면 그저 한 교회의 얘기만 했을텐데, 그날은 행복한교회까지 합치면 다섯 교회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얘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분들이 당연히 있으십니다. 성도가, 다니던 교회를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없이 기도하고 또 고민하면서 결정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단 그 교회에 식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옮기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분들이 갖는 생각인 “이 교회에 가서는 정말 ‘예배만’ 드려야지”하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 교회를 옮긴 이유는 다 다르겠지만, 교회를 옮기고 나서의 결과는 똑같아야 합니다. 곧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분명 이런 이유일텐데, 교회는 다니면서 세상적으로 완전히 나가자니 찜찜하고, 또 신앙적으로 헌신된 삶을 살자니 세상이 부러운 것입니다. 이런 삶만큼 불편하고 힘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교회생활도 마찬가집니다. 그 교회 다니기는 하는데 그냥 이름만 올려 놓는다면(우리 교회는 이런 불행한 성도를 만들지 않으려고 등록절차가 까다로운 것입니다^^) 그것처럼 불편한 교회생활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이유로든 교회를 옮기신 분들은 먼저 저와 함께 새가족반을 하시고(2주), 예수영접모임을 하시고(1주), 목장탐방을 다니시고(3번), 생명의 삶을 듣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고, 그런 다음에 연합교회 사역도(이것은 생명의 삶 수강 이후이니 주위 성도님들은 아무리 그분과 함께 일하고 싶어도 기다려 주십시오!)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행복한교회 오셨으니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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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보면 목사님은 가정교회를 하고 싶어 하지만 교인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결국 포기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는 참 복 받은 사람입니다. 원로목사님과 함께 7년 동안 우리 교회에 가정교회를 셋팅하였고, 그 경험을 가지고 서울의 30년 된 전통교회를 가정교회로 전환시켜 보았고, 또 다시 우리 교회에 와서는 18년 차가 된 가정교회를 성도들과 함께 섬겨보는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꼭 교인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익숙하지 않은 것에는 저항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가정교회를 반대하는 것도 그같은 이유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우리 교회를 무슨 특별한 교회로 만들려고 하나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의 교회에 청빙을 받아 가서 2년 동안은 ‘가정교회’라는 단어는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가정교회의 모토가 ‘성경대로’이니까 “우리 한번 성경적인 교회 만들어보자”고만 성도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즉 성경적인 교회는 열매맺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어떤 열매를 맺어야 성경적인 교회일까요? 첫째,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서 7년이 지나면 그 사람 주위에 안 믿는 사람들이 없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이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VIP 주위에는 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정교회에서 올인해보고자 하는 것 중의 하나가 VIP전도입니다. VIP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마치 고구마 줄기처럼 그 사람을 따라 계속해서 비신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열매가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는 사람의 삶이 변합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타인의 삶에 넘어서지 않으려는 예의바름(?)이 있습니다. 당연히 타인이 자신의 삶에 넘어오면 불쾌해합니다. 그러나 가정교회를 하면서 남의 집도 가고 자신의 집도 오픈하다 보면 이같은 개인주의가 허물어지면서 기신자의 인격과 성품이 변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사회성을 길러주기 위한 최적의 장소도 목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셋째, 교회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가정교회 예배시간에는 간증이 많습니다. 삶공부를 수료해도 간증, 세례를 받아도 간증, 평세를 다녀와도 간증! 간증이 뭘까를 한마디로 말해본다면 내가 변화된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사람이 변화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은 없습니다. 이 세 가지 열매가 가정교회엔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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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면서 ‘만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부사역자를 하면서 많은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아마 최장수 부목사였으니까요. 그 중에서 아직까지도 같이 교제를 나누는 분이 두 분 계십니다. 지난 두 번의 주일설교에 등장(?)하신 양정협목사님과 제가 있는 동안에 우리 교회의 협동목사로 계셨던 임철목사님이십니다. 임목사님은 성서유니온의 매일성경 집필자로 사역하시다가 몇 년 전에는 통묵사역원(통독과 묵상을 병행하는)을 세우셔서 한국교회를 섬기고 계십니다.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종종 매일성경 작업에도 참여하셔서 이번 5-6월 본문 중의 하나였던 빌립보서도 임목사님이 쓰셨습니다. 임목사님의 말씀묵상에 대한 깊이와 글쓰기에 반해서 저도 한때 성서유니온 사역에 헌신할까 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에스더서를 설교하면서 예전에 목사님이 쓰신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아는 바가 별로 없더라도 성경을 이해하는데 크게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아는 것이 많다면 그만큼 도움이 되겠지만 자칫 그것은 고정관념이 되어 읽기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독자에게 사전 지식을 준비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진솔한 대화를 원합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그에 대한 지식은 자연스럽게 쌓이게 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대화를 나누듯 읽어가며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이 중요합니다. 읽는다는 것은 성경 본문을 거듭 읽는 가운데 그 의미에 깊이 가 닿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내용을 같은 생각으로 단순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의식되지 않았던 내용과 세계에 점차 눈을 떠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다보면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뜻이 또렷해집니다. 우연처럼 보인 사건에서 필연을 발견하고, 패배에서 승리의 길을 깨닫고,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사건이 알고 보니 앞뒤가 딱 맞는 섭리가 되고, 이해되지 못했던 논리의 빈 공간이 채워짐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이 말씀과 사건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 인물은 과연 어떤 처지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일까, 이런 질문과 생각을 해보는 ‘성찰적 읽기’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성경과 끊임없이 교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 놀라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큐티를 성도님들은 어렵게 생각하시는데 큐티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자면, 매일 말씀을 읽는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어떤 날은 날 위해 맞춤형으로 주신 말씀처럼 다가오기도 하겠고, 어떤 날은 ‘이런 말씀을 왜 읽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말씀도 있겠지만 내 편의대로 취사선택하지 말고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그 말씀과 대화하려고 해보면 살아있는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들어와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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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이어서 목장을 목자의 집에서만 모이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자원함’입니다. 사람은 일을 할 때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그 일을 할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유익을 생각하면 그 일을 자원해서 하기가 쉬워집니다. 목장모임도 돌아가면서 모여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여러분들이 나의 집을 열었을 때의 유익이 뭔지를 알려드리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가정교회 사역원장이신 휴스턴 서울교회 이수관 목사님은 그 유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번째, 가정의 문을 열 때 목장 식구들이 와서 그 가정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으로 가족이 됩니다. 가정교회는 결국 가족 같은 사랑을 나누어 보자는 것인데 집을 열기 전에는 가족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식구들이 집을 방문하고 나면 그 가정을 향한 기도도 더 실제적이 되고, 간절해집니다.

 

두번째, 목장 식구들이 와서 목장 예배를 드릴 때 그 집에 성령님의 임재가 임합니다. 목장 식구들이 부르는 찬양과 그 기도가 집안 구석구석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밝힐 것입니다. 목장 예배 마지막 순서에 식구들이 그 가정을 위해 비는 그 복이 그 집에 남겨질 것입니다.

 

세번째, 집을 여는 것은 자녀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칩니다. 자녀들은 집에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집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대신 늘 다른 집에는 가면서 우리 집에는 사람이 오지 않을 때 아이들은 부끄럽고, 섭섭함을 느낍니다. 늘 손님이 찾아오는 가정의 아이들은 책임감이 강해지고, 건강한 자아상과 부모에 대한 존경을 가지고 자랍니다.

 

네번째, 집을 열고 손님을 맞이할 때 인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본인이 정해 놓은 한계안에 갇혀서 삽니다. ‘나는 이 이상은 못해’ 그럴 때 나의 인생은 거기 까지이고더 크게 사용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문을 열어 젖히면 인생의 폭이 넓어지고, 삶의 깊이와 넓이가 더해지고 삶의 범위가 확장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어제도 싱글초원(목자들의 목장)을 사택에서 했습니다. 싱글들의 특성상 교회에서 모여도 괜찮은데, 싱글목자들이 먼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자취방이지만 얼마든지 오셔도 돼요. 라면을 끓여 먹든지 시켜 먹어도 되구요!!” 가정교회는 주님이 꿈꾸셨던 가족공동체를 이뤄보자는 것이므로 매주 가정에서 모일 때, 그리고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가정을 오픈할 때 그 유익과 행복이 극대화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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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 동안의 컨퍼런스를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컨퍼런스도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듣고 배우고 느끼게 하셨습니다. 제 자신의 삶, 그리고 우리 목장과 교회가 주님의 소원대로 움직여지고 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정교회는 늘 변화를 추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정교회는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경직성이 아니라 신축성을, 정체(停滯, Fixity)성이 아니라 유동성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가정교회 교안도 틀린 것이 발견되면 고칩니다. 이번에 수정하기로 한 조항은 “목장은 처음 6개월은 목자가 본을 보이기 위해서 목자의 집에서 모이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 푸짐하게 섬긴다”는 내용입니다. 본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만, 6개월을 목자의 집에서, 목자만 섬기다보니 그 결과로 목자들은 육체적으로 힘들어하고, 변하지 않는 목장 식구들을 보면서 마음적으로 지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을 하고 보니 6개월이 지나도 목원들은 자신의 집을 열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6개월 했는데 하는 김에 계속 해!’ 혹은 ‘목자목녀는 섬기는 거라면서~’ 물론 이렇게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하여튼 목자만 섬기고 있는 목장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교회는 “영혼구원하는 것”과 “제자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두는데 이 중에서 최종목표는 예수님의 사역과 성품을 닮은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 되는 것이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있는 지독한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이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책임감과 섬김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예수님의 제자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필요합니다. 책임감이 있고 섬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어디 가도 환영받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목장에서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책임감을 기르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하셔야 할 것은 목장모임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목장모임에 여러분들의 우선순위를 두셔서 in & out이 습관이 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목장에서 섬김을 연습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하셔야 할 것은 가정을 개방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VIP 전도를 강조하지만, 그것 전에 해야 할 일은 먼저 자신의 집을 열고 목장식구들을 대접해 보는 것입니다. “목장 식구들을 위해서 밥을 해 보면서 손대접의 설레임도 알게 되고, 섬김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신앙생활의 자신감도 생기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기고 신앙이 자라가는 법입니다!!”(이수관 목사님) 이 말씀의 요점은 곧 나의 변화가 우선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고 내가 바뀌면 그 행복을 VIP도 맛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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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때로 실망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천국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교회는 병원이기 때문에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용납하는 분위기가 절대 필요합니다. 모나고 이기적인 성격 고쳐보려고 교회 왔는데 모나고 이기적이라고 흉을 보는 것은, 병원에 온 중풍병자에게 숟가락질 제대로 못한다고 나무라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실수와 허물이 용납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의 분위기는 가족적이어야 하고, 교회가 가족적이 되려면 교회가 작아야 합니다. 즉 모든 교우들이 8명 정도의 작은 교회, 목장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깨진 인격이 변화를 받고, 깨진 가정이 회복됩니다. 교회는 치유공동체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사명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릭워렌 목사님이란 분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우리의 이웃이 에이즈에 걸렸고 내가 그 치료법을 알고 있는데도 말해주지 않는 것은 범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정보를 알려주면 생명의 은인으로 여길 겁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영원한 멸망인 지옥으로 가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천국 가는 방법을 전해주지 않으며, 또한 그 방법을 들은 사람들은 전해준 그리스도인들을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귀찮은 사람, 편협한 사람으로 불편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진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에 알면서도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 편하게 예수 믿고 싶은 유혹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컨트리클럽이 아니기에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내 요구만 충족시켜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소망과 치유와 위로도 받아야 하는 곳이지만, 나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나로 인해 예수님을 믿게 될 한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섬겨볼까? 내 옆에 있는 성도를 성공시켜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내가 사역할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이 같은 고민 속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더욱 행복해질 것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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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들에게는 여전히 높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문턱을 조금이라도 낮춰 보고자 기도하며 준비한 환대(歡待)의 자리, 쉴만한 물가! 어제 비로 인해 갖지 못한 시간을 오늘 오후에 진행하려고 합니다. 먼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이 일에 마음 모아 주신 성도님들과 행사를 위해서 헌신해주신 사역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초청한 VIP가 오실 분들도 계시고, 이번에도 꿈쩍도 하지 않은 VIP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들의 영혼과 인생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만나고 초청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 쉴만한 물가 행사를 놓고 성도님들과 10가지 제목을 가지고 새벽기도를 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쉴만한 물가를 통해 VIP들의 발걸음이 목장으로, 연합교회로, 예수영접모임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있어지게 하옵소서!” 이것이 기도를 심는 것입니다. VIP들은 여러분들의 초청을 받고 오늘 한번 오는 것뿐이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은 목장과 교회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미리 이렇게 기도를 심어 놓으면 기도한대로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VIP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목장에서 VIP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실 수 있는 기도문을 알려 드릴테니 계속하여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가 ○○○를 위해 기도하는 동안 그를 섬길 기회가 열어지게 해 주셔서 여기저기서 자주 만나게 해 주세요! 우리가 ○○○를 찾아가 섬길 때 그의 필요가 잘 보이게 해 주시고, 그의 마음이 열려 기독교, 교회, 하나님, 신자들에 대한 편견, 오해, 선입견이 사라지게 해 주시고, ○○○를 붙들고 있는 어둠의 영이 예수 이름으로 떠나게 해 주세요! ○○○가 우리를 만날수록 좋아하게 해 주셔서 목장 초대에 응하게 하시고 ‘나도 믿어볼까?’하는 마음이 생기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VIP전도는 정말 인간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기도와 함께 이런 기도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의 자기중심적인 죄악성을 깨닫게 해 주셔서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해 주세요! 성령님, ○○○가 예수님만 진정한 구원의 의가 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자기 의를 내려놓게 해주세요! 성령님, ○○○가 죽음 이후에 있을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알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주님께 돌아오게 해 주세요!” 우리가 VIP를 위해 기도를 심으면 언젠가는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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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연속 3주 세례식이 있어서 저도 이 기회에 세례에 대한 칼럼을 세 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배성길 성도님의 세례간증에 “우리의 마음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요한계시록3:20)”에 관한 얘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 않으십니다. 내가 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 문을 열어드릴지, 아니면 계속해서 주님을 문 앞에 세워둘지 선택권을 나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유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선택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구원의 주도권도 나에게 있을 것 같은데, 사실 구원의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일은 그저 문 열어 드리는 것 뿐이고 그 뒤로 이어지는 모든 일은 다 예수님이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문만 열어드리면 예수님은 그 문으로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먹어” 주십니다.

 

우리는 주로 가족과 함께 먹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마음 문만 열면 내가 들어가서 너와 함께 먹어 줄 것”이라는 말씀은 네가 나를 영접하기만 하면 “나는 너와 함께 식구처럼 살아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식구처럼 살아주신다니?이것보다 우리를 든든하게 하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그 문을 얼마큼 열어야 될까요? 활짝 아니면 쪼금? 만약 들어오기 싫은 사람을 내가 억지로 내 방에 들어오게 하려면 문을 활짝 열고 잡아 끌어야겠죠? 하지만 들어오고 싶어서 내 방 문을 노크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문을 조금만 열어줘도 됩니다. 아니 “들어오세요”라고 말만 해도 자기가 알아서 들어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마음의 문을 아주 조금만, 살짝 열어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십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내 의지보다 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의지가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들 중에 세례를 권유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세례는 받고 싶은데 꼭 간증을 해야 하나요? 제 간증은 별로 울림이 없어서요. 제 간증은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아서요.”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내 마음 문을 노크하실 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그렇게 해서 들리겠어요? 좀 제대로, 세게 두드려 보세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꼭 강렬한 느낌이나 특별한 사건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복음을 듣고 믿을만한 이유가 7~80% 되고, 여전히 믿기 힘든 이유가 2~30%가 되어도 “예수님! 제가 당신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신뢰하며 살아볼께요”라고 믿기로 결정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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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시는 두 분의 성도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우리 장로교단만 보더라도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서 6개월이 된 성도에게 기초적인 교리교육을 시킵니다. 그것을 ‘학습’이라고 합니다. 학습을 받고나서 6개월이 지나면 다시 좀더 심화된 교육을 한 후에 그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러다보니 몇 가지 단점이 있는데 첫째, 6개월이라는 기간 때문에 세례를 받는 사람이 한번에 몰리게 되어 세례를 단체로(?) 받게 됩니다. 세례를 영적생일이라고 부를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6개월에 한번씩 무슨 행사 치르듯이 도매금으로 세례식을 한다는 것이 좀 아쉽고,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에게도 저는 죄송했습니다. 둘째, 그렇게 세례를 받게 되니 세례식에서 가장 중요한 그분의 ‘신앙고백’을 공동체가 들어볼 수 없다는 것도 큰 단점이었습니다. 세례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게 된 것을 공동체가 함께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그런 결심을 한 것을 목사는 그분과의 교육과 면담을 통해서 확인했기에 세례를 베푸는 것이지만 성도들은 모릅니다. 그러니 세례식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목사의 선포보다 그분의 신앙고백과 앞으로 믿음으로 살겠다는 선포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지 6개월이면 학습, 그 뒤로 6개월이면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만 있다면 세례는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행8:36)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했고 주일예배도 나오는 분들 중에 세례를 미루시는 분들은 세례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례는 1, 2년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성경도 한두번 읽은 후에 “그래 이 정도면 세례 받을만해!”라고 생각될 때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 보기로 결심하고 교회를 나오는 것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정도라면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세례를 미룬 사실은 유명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를 “죄를 씻는 허가증”으로 여겼기 때문에 세상에서 욕망을 따라 살다가 자기가 편할 때 세례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콘스탄틴은 일찍 세례를 받아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육신이 누리고 싶은 것들에 제약을 받는 부담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두 분을 보시고 ‘나도 세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이 계시면 더 이상 세례를 미루지 마시고 예수영접모임에 들어오시기를 부탁합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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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엡1:23).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건강한 유기체는 자라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성장하였고, 로마 제국을 뒤덮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가 양적 성장을 해야만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은 교인들의 장막이나 회사의 이동이 잦기 때문에, 전도를 많이 해도 교회 성장이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적 성장은 못해도, 구원받는 사람은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 숫자가 중요합니다. 숫자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 부흥을 설명할 때마다 숫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3천명에게 세례를 주었고(행2:41) 어느 때는 5천명이 더해졌다고(행4:4)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지속적으로 부흥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라는 산술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나 힌두교 같이 종교적으로 폐쇄된 나라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 세례 숫자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법적으로 제한을 받아서 전도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 상황은 다릅니다. 법적인 제제나 핍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요4:35)”라는 상황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올해 우리 교회, 우리 목장은 몇 명에게 세례를 주었는가?”를 늘 물어야 합니다. 교회의 질적 성숙과 양적 성장은 같이 갑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성숙해지는 것은 헌신적으로 VIP들을 섬겨서 이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도록 돕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그 교회의 본질을 추구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본질이 회복되어가면 열매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란, 비신자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과 기신자가 예수님처럼 섬김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 이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2025년이 시작되면서 올해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이 이런 복을 주실 것 같은 기대가 있어서 “하나님, 올해는 한달에 두명씩 세례받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2월에 세례가 두 명 있었습니다. 3월에는 없어서 하나님께 죄송했는데, 오늘 두 분, 그리고 다음 주 두 분 해서 4월에 네 명, 3월에 없던 것까지 채워주시는 것을 보니 정말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한 명의 영혼이 세례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바라기는 올해 우리 교회가 더욱 영혼구원에 올인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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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력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율리우스력의 오차를 수정하기 위하여 만든 역법입니다. 1년을 365.25일로 보는 율리우스력은 태양년의 1년(365.24일)보다 매년 11분가량 길어집니다. 이 차이가 누적되면 128년마다 하루의 편차가 발생합니다. 이런 차이는 16세기에 이르러 천문학적 춘분과 달력의 춘분 사이에 열흘의 차이를 발생시켰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런 차이를 수정하기 위해 1582년 10월 4일의 다음 날을 10월 15일로 정해 열흘의 편차를 줄이고 이를 그레고리력으로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동서교회 분열 이후 로마카톨릭과 긴장관계에 있던 정교회가 새로운 역법을 거부하고 율리우스력을 고수하면서 두 개의 부활절이 생겼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왜 부활주일이 매년 다르냐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부활절을 정한 325년 니케아공의회 때 “춘분 다음의 만월이 지난 후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하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회의에서 부활주일 전 40일 동안 참회와 금욕생활을 하도록 결정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기간이 사순절로 굳어진 것입니다. 순(旬)이라는 말은 10일을 의미하는 한자입니다. 부활절 이전으로 계산하여 일요일을 뺀 40일 동안 지켜야 하는 절기입니다. 그 기간 안에 일요일이 6번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부활주일 전 46일째(그날이 수요일이 됩니다)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그 시작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부르는데 재에 구르며 애통해하는 것으로 사순절을 시작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순절은 로마카톨릭에서 정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절기이기 때문에 1999년 우리 교단 총회에서는 사순절을 지키지 않기로 했습니다. 물론 부활절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고 동참한다는 것은 좋은 의도이지만 의식을 강조하는 중세시대의 산물임으로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지 않고 있고, 따라서 지키지도 않는 절기의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대신 우리는 부활주일 7일 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종려주일)부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한주간의 행적들을 묵상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고난주간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제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형식이 있어야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해보는 좋은 형식이 바로 고난주간 특새입니다. 부활주일의 기쁨을 더욱 경험하기 위해서 한 주간 새벽을 깨워보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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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부터 새벽과 주일, 계속해서 누가복음을 살펴보면서 더욱 느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흘러내릴 수도 있고 안 내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은 무조건 흘러내려서 낮은 곳에 고이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자동적으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 환우들, 신체장애자들에 유난히 관심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이 약하니까 내가 더 사랑해야지’ 하셔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자동적으로 흘러서 고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 신자는 그 시간들을 충분히 감내하게 됩니다. 높은 언덕에 물이 고여 있을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이 높은 산처럼 교만해져 있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머무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당해서 우리 마음이 한없이 낮아지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동적으로 고입니다. 생명의 삶에서 죄에 대해서 가르쳐 드릴 때 많은 분들이 동의하시는 것이 “죄는 장래가 내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모두 내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시기에 찾아옵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하면서 ‘내 인생이 내가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인생은 유리병처럼 깨지기 쉬운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취미가 우리를 괴롭히시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은 내가 노력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그 착각을 깨뜨리시기 위해서, 그 높아진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런 고난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분들이 많은 것만 보아도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생명의 삶에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너무 고난이 크면 위에서 말씀드린 것으로 위로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산불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 앞에서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신 것”이라는 말이 어떻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이 땅에서는 답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닌데,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낮은 곳에 고인다는 것, 하나님은 절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의미없는 고난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버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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